문화공간, 그곳 (26) 서울 세운상가 3층 갤러리

전자부품·비아그라 간판 사이 ‘예술’이 꽃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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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3층에 작은 전시공간이 하나둘 늘고 있다. 지난 7월26일 ‘개방회로’에서 열린 작가와의 대화시간 ‘탐구생활 백분토크’. 각 갤러리 제공

[문화‘랑’] 공간과 사람

문화공간, 그곳 (26) 서울 세운상가 3층 갤러리

권리금 없고 임대료 저렴해
갤러리들 하나둘씩 들어와
작가들이 자생할 수 있는
독립 생태모델 공간 꿈꿔
공원예술상점·백분토크 등
특이한 전시 잇달아 열려

‘도청 탐지기, 위치 추적기, 도박 장비, 비아그라·흥분제’ 같은 간판이 걸린 서울 세운상가 1층 계단을 오르면 시시티브이(CCTV)와 몰카 탐지기를 파는 서로 모순된 가게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다. 1967년 종로에 문을 열고부터 오랫동안 서울의 랜드마크로 기능했던 공간의 영욕이 하나의 장면으로 포착된다. 기계부품을 생산·판매하는 도심 산업네트워크 중심축(1960년대), 전자제품 종합 쇼핑몰(1970년대), 첨단 게임부터 불법 음란물까지 모든 물건들을 다 갖춘 개발시대 활력의 상징(1980~90년대) 등을 지나오며 그 시절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 최근 작가들의 갤러리가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다. 워낙에도 몇 가지로 한정할 수 없던 세운상가의 다양성이 새로운 가지를 치고 있는 것이다.

세운상가 유토피아 그리는 ‘300/20’
시작은 지난해 11월에 들어선 갤러리 ‘300/20’(삼백에 이십)이었다. 김갑환·김환중·왕자은·정명우 작가는 세운전자상가 3층 바열 328호에 그들의 공동 작업실 겸 전시공간을 열었다. 도심 한복판인데다 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새겨진 곳임에도 놀랍도록 월세가 쌌다. 세운상가 상권이 죽어버리면서 권리금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생존과 지속 가능한 작업 방식을 고민하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20만원이라는 싼 임대료가 중요했다. 내친김에 갤러리 이름도 ‘300/20’이라고 붙였다. ‘한국영상’이라는, 전 주인이 붙인 간판은 반쯤 떨어진 채 남아 있다. 300/20이라는 갤러리 간판은 안쪽에 달았다. 언뜻 보아선 갤러리 티가 나지 않는데다 12㎡ 남짓한 공간은 작가 한명이 쓰기에도 좁아 보이지만 벌써 올해만도 6명의 작가가 이곳에서 차례로 전시를 열었다.“올해 모두 11명의 작가가 전시할 예정이다. 작업 매체는 작가마다 다르지만 주제는 한가지, ‘유토피아’다. 설계 당시 세운상가가 낙원으로 가는 배를 형상화했다는 데서 착안했다. 1970년대 낙원과 지금의 낙원은 어떻게 다른지, 관객들은 지나버린 낙원의 꿈 위에 서서 다른 낙원을 떠올릴 것”이라고 김갑환 작가는 설명했다. 2009년 종로에 접한 현대상가를 철거하고 초록띠 공원으로 만들면서 낙원으로 가는 배 앞머리가 잘린 셈이 됐지만 아직도 하늘에서 보면 세운상가 가동, 대림·청계·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상·진양 7개 상가는 배 모양을 그리고 있다.“여기는 비현실적인 영화세트장 같은 곳”이라고 왕자은 작가는 털어놓지만 세운상가 쪽에서도 작가들이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요즘도 옆 가게 아저씨들이 뭐하는 곳이냐, 뭘 팔아서 먹고사느냐고 물어요. 작가들이 자생할 수 있는 생태모델 같은 것을 만들고 싶어요.”(김갑환) “굳이 상가에 들어온 이유는 전시하고 판매하는 행위조차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싶었기 때문이죠.”(정명우) 요즘 세운상가엔 박박희 작가, 전보경 작가 등 다른 작가들도 하나둘씩 작업실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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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3층에 작은 전시공간이 하나둘 늘고 있다. 지난 5월 ‘300/20’에서 열린 김정화 개인전 ‘신세기 통신’. 각 갤러리 제공

대안공간 꿈꾸는 ‘개방회로’
올해 5월 세운상가 3층 가열 327호에는 ‘개방회로’가 문을 열었다. 이 공간을 공동운영하는 조근하·이현인·김세현·이예슬씨 등은 퍼포먼스, 문화기획, 전통예술 등 전공은 사뭇 다르지만 공동체 예술, 커뮤니티 아트 다음 대안은 무엇일지 고민하는 마음이 비슷했다. “기존 미술체제가 주류들만의 리그인 폐쇄회로였다면 우리는 그 폐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개방회로라는 이름으로 뭉쳤죠. 대안공간들이 점점 힘을 잃고 있으니까 우리 손으로 직접 작가들의 거점이나 접점 같은 곳을 마련해보고 싶었어요.”(김세현)개관한 지 얼마 안 됐지만 팀 멤버들의 다양성에 힘입어 개방회로에서는 특이한 전시가 잇달아 열렸다. 일본 작가 올타의 드로잉전과 퍼포먼스, 작가들의 물건을 파는 공원예술상점, 예술가들과 이야기하는 아티스트 백분토크 등이 열렸으며 11월엔 전통음악인 김보라씨가 공연할 예정이다. 공연 때면 가게 앞 널찍한 보행데크까지도 옥외 공간으로 쓸 수 있다. 2000년대만 해도 포르노 비디오, 게임 시디를 팔던 좌판으로 발 디딜 틈 없던 세운상가 보행데크는 오랫동안 텅 비어 있었지만 젊은 작가들 목소리로 북적이게 됐다.“우리는 모두 소소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작은 움직임을 갖는 사람들이 모여서 실험적인 활동을 하면 나름의 색을 띠게 되리라고 믿는다.”(조근하) “작가들을 위한 입주 창작소는 항상 유휴지나 도심에서 벗어난 곳에 있다. 세운상가는 어떤 작업의 재료든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원대한 꿈이지만 작가들의 전시·작업 공간들로 이곳이 채워졌으면 좋겠다.”(이현인) 갤러리에는 근처 재봉 상가에서 ‘개방회로’라고 수를 놓은 광목천이 간판 대신 펄럭이고 있다.

‘300/20’의 자매공간 ‘800/40’
지난 5일 세운상가와 등을 맞댄 대림상가 3층 라열 358호 ‘800/40’(팔백에 사십)에서는 9명의 작가가 ‘스위트 리틀 식스틴’이라는 제목의 공동 전시를 열었다. 사진, 회화, 설치 등 장르도 다양한 전시는 김양우·김정화·고초옥·김세윤 등 회화를 전공한 4명의 작가가 함께 기획한 것이다. 자매공간인 ‘300/20’과 임대료는 비슷하지만 올해 5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예전 장소 임대료를 반영한 갤러리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늦은 밤 갤러리를 지키던 김세윤 작가는 “개인이 중요하다. 같이 공간을 운영하지만 자기 예술을 지킬 수 있는 방향을 늘 고민한다”고 했다. 따로 또 각자, 세운상가 3층에서 작가들은 독립생존의 꿈을 꾼다. 800/40에서는 오는 20일부터 유목화씨의 개인전 ‘그랜드 캬바레’전이 열릴 예정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from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6548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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